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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의 일/고객

서비스 뒤에 사람

래퍼분 인터뷰를 했다. 

 

  사실 지난 몇개월 동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기획한 서비스에 대한 열정도, 새로운 서비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낼 자신도 다 사라진 상태였다. 

 

  몇달째 이 프로젝트는 끝내지도, 제대로 책임지지도 못하고 마음 한 켠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편한 존재였다. 

 

  그리고 대표가 래퍼들을 위한 가사를 생성해주는 인공지능을 다음 서비스로 만들겠다며, 나한테 화면을 기획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화면을 짜는데, 화면을 짜는 내내 스스로 짜증과 화가 치밀었다. '대체 이걸 왜 해야 되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지?' 스스로도 납득이 안되는데, 그걸로 누가 누굴 설득하겠다는건지라는 한심함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대표한테 전화해서 이걸 왜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대표도 기획자들이 의미를 못 찾는 서비스를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대화를 통해 애초에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때 물어봤어야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물어볼 생각도 안 했고, 더 좋은 아이디어는 제시하지도 못했고, 더구다나 우리 팀에 있는 래퍼분들의 이야기는 들어볼 생각도 안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놓고 래퍼만 타겟으로 잡으면 너무 좁은 것 같아요, 랩 가사는 별로인 것 같아요라고 투덜대기만 했다. 

 

  그니까 결국에는 대표 입을 통해 전달받는게 아니라 내가 직접 들어야 했던 거다. 그제서야 랩이란게 뭔지, 벌스는 뭐고, 랩 가사 구성엔 라임과 플로우와 펀치라인이 중요하다는 것도 부랴부랴 정리하고, 래퍼분들이랑 인터뷰 일정을 잡고, 질문지를 짜고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서야 "제가 꼭 XX님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걸 만들어볼게요"라는 말이 나왔다. 지금까지  "래퍼를 위한 가사 만들기"는 내가 기획할 서비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였는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랩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듣고 이해하고 나서야, 그건 서비스 이상으로 정말 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이고, 누군가의 삶을 응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분들이 좀 더 즐겁고 편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랩 작업을 했으면 바라게 됐다. 물론 우리가 만들 서비스나 기술이 무명 래퍼분들이 겪는 좀 더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는 한계도 알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기획할 서비스가, 서비스나 기획 그 자체가 아니라 사실은 그 뒤에 사람이 있는 서비스로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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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리

1. 직업인으로서 (무명) 래퍼: 본업에만 쏟을 시간이 부족하다. 학업, 알바 쪼개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음. 

2. 비트보다는 가사를 쓰는 일이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막힐 때가 많다.

3. 가사는 내용적인 부분(내가 하고 싶은 말)과 기술적인 부분(라임, 플로우, 펀치라인) 등이 있다. 둘 다 어렵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 내용적인 부분이 가장 어렵긴 하다.

4.  인공지능이 내용적인 부분을 도와주기에는 어려울 것 같음. 아티스트의 originality이고, 프라이드가 있을 것 같아서.

5.  다만 라임의 경우도 독창적으로 쓸 수도 있지만(힘을 주는 가사), 적당히 넘어가는 부분도 있다.

6.  기존에는 네이버 사전에서 검색했지만, 1) 재미없고 2) 관련성 없는 단어가 나와서 찾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 인공지능이 좀 더 단순한 작업을 도와줘서 창의적인 영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 유치한 단어 말고, 다양한 라임을 살린 단어/문구를 생성해주되, 관련성 있는 단어 순으로 보여주는 것. 가능한가? bert, word2vec  모델팀 일단 11/15 까지 해본다고 함. 갓중현
  • 가사 생성 해주면서도 트레이닝 데이터를 모을 수 있게끔 데이터 선순환 할 수 있는 방식의 기획이 뭐가 있을까?

 

덧, 오랜만에 인터뷰를 하고 나니, 내가 왜 대학원에서 통계가 아니라 굳이 사람을 직접 만나는 질적 방법을 선택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는 누군가의 삶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항상 그 사람들의 삶에 경의를 느낀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짊어지면서 죽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심이 되고, 거기서 언제나 삶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역시 사람을 만나야 원동력을 가질 수 있는듯 ㅇ-ㅇ